2016년 3월 15일 화요일

乾元者 (삼화 한장경)

乾元者 始而亨者也...雲行雨施天下平也











이 一節은 彖辭의 文言이다.
物의 元亨 段階는 먼저 形質의 發育이 있고 아직 本然의 性情을 具치 못하는 것이므로 乾元이라 함은 物이 始하여 그 形이 長하는 것이며, 利貞段階는 形質이 이미 定하고 本然의 性情이 成하는 것이다. 彖辭에는 性命을 말하고 文言에는 性情을 말하니, 命은 天의 賦與한 使命이오 情은 天性에서 發하는 生生本能이라 彖은 天道를 말한 까닭에 性命이라 하고 文言은 人道를 말한 까닭에 性情이라 한 것이다.
 
乾始라 함은 乾元의 始함이오 美라 함은 嘉의 會하는 亨이오 利라 함은 義의 和함이니 乾元이 物을 始하고 美와 利로써 그것을 個個히 長育하고 統一的으로 義和하여 天下의 萬物을 모두 裁成하되 乾元의 統天作用은 自然스럽게 行하여 그 統一하는 形跡을 나타내지 아니하며 (不言의 뜻)萬物의 生生은 모두 同一한 自然法則에 統一되고 있으되 各自의 物은 各其 獨立生活을 하는 것으로 되어 自然法則에 裁成되고 있음을 알지 못하고 있으니 이가 乾元의 大矣哉한 所以이다
大哉乾乎라 함은 乾의 全象을 말함이오 乾에는 卦辭의 元亨利貞의 四德과 爻辭의 潛 見 惕 躍 飛 亢의 六龍이 있으니, 四德과 六龍이 곧 大哉한 所以이다. 剛 健 中 正은 元亨利貞의 四德을 말함이오 六爻發揮는 潛見惕躍飛亢의 六龍을 말한 것이며, 卦辭는 天道이오 爻辭는 地道이라 사람의 天性은 日月光明의 圓深通明한 作用으로부터 오는 것이므로 天道에 屬하고 情은 달에서 震子가 兌精의 相合하는 作用으로부터 오는 것이므로 地道에 屬하니, 그러므로 純粹精은 圓深通明한 天性을 말함이오 旁通情은 震子兌精의 生生하는 情을 말함이다.
 
純은 糸와 屯으로 되어 屯卦의 經綸의 뜻으로서 盤桓하여 圓한 象이오 粹는 米와 卒로 되어 草와 卒을 合한 萃卦의 뜻으로서 澤이 聚하여 深한 象이며, 精은 水火의 合한 것으로서 水通火明한 象이니, 純粹精이라 함은 사람의 天性이 圓하고 深하고 通明하다 함을 말함이오 旁通이라 함은 日月 暈과 같이 中心으로부터 圓形으로 外向하여 發하는 것이니 生生의 本能이 天性에서 發하는 것을 旁通情이라 한 것이다. 文言은 人道를 말한 까닭에 卦辭의 四德을 天性으로 解釋하고 爻辭의 六龍을 情으로 解釋하니 이는 또한 仁 禮 義 知는 性이오 潛見惕躍飛亢은 情이라 함을 말한 것이다.
彖辭에는 雲行雨施를 먼저 말하고 다음에 御天을 말하며 文言에는 御天을 먼저 말하고 다음에 雲行雨施를 말하니 이는 彖辭는 大明의 生成을 말한 까닭에 雲行雨施品物流形한 뒤에 乘龍御天하는 것이오 文言은 사람의 性情을 말한 까닭에 사람의 天性이 成하여 天에 圜行한 뒤에 神의 事業을 祐하여 天下가 平하는 것이다.
 
君子 以成德爲行....君子弗用也
이는 初九小象의 陽在下也의 文言이다.
日可見之라 함은 日用한다는 뜻도 되고 太陽의 光明을 見한다는 뜻도 되니, 爻辭文言의 不見是의 是와 相照하는 것이오 陽이 下에 있으므로 隱而未見行而未成이 되는 것이다.
爲言이라는 말은 潛之爲言也 亢之爲言也 妙萬物而爲言이 있으니, 乾初上의 爲言도 또한 神의 爲言이다.
乾五有鬼神之象 故初上之言 潛言亢亦皆神之言也
 
 
君子 學以聚之....君德也
이는 九二小象의 德施普也의 文言이오 爻辭文言의 德博而化와 同一한 뜻이다.
君子가 德을 修함에는 學聚 問辨 寬居 仁行의 네 가지가 있으니, 이는 四情에서 나온 것이다. 九二에 性命의 象이 있으므로 또한 性에서 發하는 情의 象이 있으니, 學以聚之는 萃聚의 情이오 問以辨之는 感應의 情이오 寬以居之는 恒久의 情이오 仁以行之는 天地에만 있는 正大의 情이다. 彖辭의 文言에 「利貞者性情也」라 한 것도 九二가 利貞의 位로 되어 性命과 性情의 象이 있음을 말한 것이다.
君德이라 함은 乾君의 德이오 德施普의 德이니, 이는 九五 天德의 位에서 下施하는 德이며, 君德의 下施가 곧 利見大人의 象이다.
 
九三 重剛而不中....雖危無咎矣
이는 九三小象의 反復道也의 文言이다.
重剛이라 함은 上乾下乾의 境界에 있음을 象함이오 中치 못하고 不在天不在田하여 天地間의 人位에 있으므로 下乾上乾하여 一陰一陽하는 道를 反復하는 것이며 陰體가 陽을 遇하는 時와 遇치 못하는 時가 있음을 因하여 그心을 光明케 하면 비록 陰中을 涉하여 危하되 陰陽이 異各치 아니 하는 것이다.
 
 
九四 重剛而不中....故無咎
이는 九四小象의 進無咎의 文言이다.
上乾下乾의 境界에 있어 中치 못하고 不在天 不在田 不在人하여 天空中에 있으니 이는 進退不定의 象이다. 或이라 함은 不安定함이오 疑라 함은 心의 枝疑未定함이니 九四는 天空中의 安定치 못한 位에 있으므로 스스로 試하여 進한 然後에 陰陽이 相遇하여 異各치 아니하여 時에 及하는 것이다.
六爻中에 오직 九三과 九四에만 爻位를 말한 것은 重剛不中한 爻位에서 君子가 進德修業하여 九三에서 反復하고 九四에서 進退하고 함을 말하기 爲함이다.
 
夫大人者 與天地合其德....況於鬼神乎
이는 九五小象의 大人造也의 文言이니, 夫大人은 「저大人」 또는 「그大人」이라는 뜻으로서 大人造의 大人을 指함이다.
與天地合其德 與日月合其明 與四時合其序는 그 事象이 外面에 나타난 三顯이오 與鬼神合其吉凶은 無形無體한 一藏이다. 鬼神이라 함은 무엇인가 하면 天地에는 唯一神이 있고 神이 萬物의 生生作用을 行함에는 마치 사람이 生生作用을 行함에 耳 目 口 鼻 手足等이 各其 任務를 나누어 部分的으로 動作함과 같이 神도 神全體가 行하는 것이 아니라 神의 여러 分身이 各其 맡은 바의 任務를 行하는 것이오, 이 分身이 곧 鬼神이다.
 
鬼는 個體 獨有의 作用이오 神은 天地 統體의 作用이니 天地 唯一神은 天地 統體의 作用이므로 거기에는 神만 있고 鬼가 없으며 神의 分身은 이미 個體를 가지고 있으므로 거기에 鬼와 神의 두 作用이 아울러 있는 것이다. 與鬼神合其吉凶이라 함은 大人의 吉凶이 곧 鬼神의 吉凶이오 鬼神의 吉凶이 곧 天의 吉凶이므로 大人은 鬼神으로 더불어 그 吉凶을 合하고 또 天으로 더불어 그 吉凶을 合하여 天에 先하되 天이 違치 아니 하는 것이다. 여기에 天이라 함은 神의 居하시는 位를 말함이니 그러므로 天이 違치 아니한다 함은 곧 神이 違치 아니 한다는 뜻이다.
 
鬼神의 吉凶이라 함은 무엇인가 하면, 謙卦에 「鬼神害盈而福謙」이라 한바 鬼神의 福하는 것은 吉이 되고 害하는 것은 凶이 되는 것이다. 鬼神은 무슨 까닭에 사람을 福하고 害하고 하는가 하면 사람은 神에서 生하여 神의 生長成法則에 依하여 生生하고 있으므로 사람의 生生하는 法則은 곧 神의 分身인 鬼神의 運行法則이며 그러므로 鬼神의 吉凶은 또한 사람의 吉凶과 一致하니 이가 鬼神이 사람을 福하고 害하는 象이다. 그런데 鬼神이 사람에 對하여 福害의 作用을 行함에는, 善한 者를 卽時로 福하고 惡한 者를 卽時로 害하고 하는 것이 아니다. 繫辭에 「善不積不足以成名 惡不積不足以滅身」이라 하니 이는 善도 많이 行하여 積한 然後에 福을 받는 것이오, 惡도 많이 行하여 積한 然後에 害를 받는다 함을 말함이다. 萬一 善을 行하되 조금 行하고 다시 行치 아니하여 善이 積치 아니하면 成名하는 福이 오지 아니하고 惡을 行하되 조금 行하고 다시 行치 아니하여 惡이 積치 아니하면 滅身하는 害가 오지 아니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物의 生長成의 理에 依하여 善을 積하면 善이 長成하여 鬼神으로부터 福을 받아서 生氣가 繼續하는 것이니 이가 鬼神의 吉하다 하는 것이오 惡을 積하면 惡이 長成하여 鬼神으로부터 害를 받아서 쭉정이가 되는 것이니 이가 鬼神의 凶하다 하는 것이다. 謙卦의 盈과 謙은, 이것을 人事로써 보면 盈은 驕盈함이오 謙은 謙讓함이다. 惡의 積한 것이 곧 盈이오 善의 積한 것이 곧 謙이니 그러므로 사람의 驕盈한 者는 鬼神으로부터 害를 받아서 凶하고 謙讓한 者는 鬼神으로부터 福을 받아서 吉한 것이다.
 
九五爻의 大人은 小象의 大人造의 大人이오 造는 天造의 뜻으로서 乾陽을 陰體에 施하는 作用이 곧 天造이니 天造는 物을 創造한다 함이다. 天에 先하되 天이 違치 아니한다 함은 天의 開闢하기 以前에 大人이 物을 創造하되 天道에 違치 아니한다 함이오 天에 後함에 天時를 奉한다 함은 天의 開闢以後에 天時를 奉行하여 物을 創造하면 天時에 合한다 함인데 九五에 天의 開闢以前과 開闢以後의 象으로서는 生의 時運의 象인 伏羲八卦圖와 長의 時運의 象인 文王八卦圖가 있다. 伏羲八卦圖는 天의 開闢하기 以前의 天地渾沌한 象을 圖寫한 것이니 이는 天에 先함이오 伏羲八卦圖가 天에 先하되 天地의 運行하는 天道가 卦圖에 如實히 나타나고 있으니 이가 天不違이다. 文王八卦圖는 天이 開闢한 以後의 萬物生長하는 象을 圖寫한 것이니 이는 天에 後함이오 文王八卦圖가 天에 後하여 天地의 運行하는 天時가 卦圖에 如實히 나타나고 있으니 이가 奉天時이다. 伏羲八卦圖는 天에 先하므로 先天의 象이 되고 文王八卦圖는 天에 後하므로 后天의 象이 되니 이는 長의 時運에 있어서는, 生의 時運은 先天이 되고 長의 時運은 后天이 되는 것이며 時運이 變하여 生長時運으로부터 成의 時運으로 넘어가는 때에는 生長時運은 모두 先天이 되고 成의 時運은 后天이 되는 것이니 그러므로 易經(周易)은 先天易이 되고 正易은 后天易이 되는 것이다.
 
况於鬼神乎의 鬼神은 與鬼神合其吉凶의 鬼神이니 天도 大人의 創造한 卦圖의 理를 違치 못하므로 神의 分身인 鬼神도 또한 卦圖의 理를 違치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伏羲八卦圖의 理와 文王八卦圖의 理는 天도 違치 못하고 사람도 違치 못하고 鬼神도 違치 못하여 天 人 鬼神이 모두 그 生長成의 原理를 따라가서 生長成의 作用을 行하는 것이니 이가 易이 天地로 더불어 準하고 天地로 더불어 相似하고 한 所以이다.
 
四時日月
四時의 象은, 文王八卦圖의 四正으로써 보면 震은 正春이오 離는 正夏이오 兌는 正秋이오 坎은 正冬이며 易卦中에 四時를 말한 것은 統天卦인 乾 以外에 五卦가 있으니 豫와 觀에는 「四時不忒」이라 하고 恒에는 「四時變化」라 하고 革과 節에는 「四時成」이라 하니 卦象과 序卦로써 보면 豫는 春이오 觀은 夏이오 恒은 夏秋의 交이오 革은 秋이오 節은 冬이다. 革과 節에 四時를 말한 것은 革은 南의 離로부터 西의 兌로 옮기는 正秋이오 節은 西의 兌로부터 北의 坎으로 옮기는 正冬인 까닭이다. 坎으로부터 震하는 解와 震으로부터 離하는 噬嗑에는 春과 夏의 四時를 말하지 아니하고 豫와 觀에 四時를 말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면, 四時라 함은 生長成의 理이오 春과 夏의 生長은 반드시 雷風의 氣가 乾坤生命元을 運行하여 地上에 流行하여 地力을 吸取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文王八卦圖의 流行이 東과 東南의 雷風에서 始하는 것이오 이가 雷風이 地에 行하는 豫와 觀에 四時를 말한 所以이다. 秋冬에 物을 成함에는 地力을 吸取하지 아니하고 이미 吸取한 膏澤을 資賴하여 太陽의 光熱과 雨露等을 받아서 凝成하는 것이므로 水火 및 澤으로 된 革과 節에 四時를 말한 것이다. 恒은 雷風의 卦이라 春豫夏觀의 雷風이 合하여 生命元을 運行하는 力이 되어 生長에서 成으로 넘어가는 生成의 變化를 行하고 있으므로 恒에 四時의 變化를 말하고 序卦로는 豫觀의 生長과 革節의 成의 中間에 位한 것이다. 卦中에 日月을 말한 것은 統天卦인 乾以外에 오직 豫 恒 및 離이니 離는 上離下離인 까닭에 繼明의 象이 있어 日月의 麗天이 된 것이오 豫와 恒은 四時卦인데 四時는 日月의 運行에 依하여 生하고 日月의 光明은 震子의 作用에 依하여 生하며 四時卦中에서 震子를 合한 卦는 오직 豫와 恒이므로 이 두 卦에만 日月을 말한 것이다.
 
亢之爲言也.....不失其正者 其唯聖人乎
이는 上九小象의 盈不可久의 文言이다.
知進而不知退 知存而不知亡 知得而不知喪은 모두 盈의 象이오 盈한 者는 반드시 虧하여 久치 못한 것이다. 聖人을 거듭 말한 것은 前者는 進退 存亡 得喪을 知함을 聖人이라 한 것이오 後者는 不失其正함을 聖人이라 한 것이다. 먼저에는 進退 存亡 得喪을 말하고 뒤에는 進退 存亡만을 말하니 이는 不失其正의 失이 곧 喪의 뜻인 까닭이다.
 
繫辭에 「易窮則變 變則通 通則久 皇帝堯舜垂衣裳 而天下治盖取諸乾坤」이라 하니 乾坤에는 窮變通久의 道가 있는데 皇帝堯舜은 이 乾坤의 道를 法하여 變通한 까닭에 久한 것이오 上九는 窮之災의 象인데 이 乾坤變通의 道를 知치 못한 까닭에 盈하여 久치 못한 것이며 其唯聖人乎라 함은 窮變通久의 道를 知하여 不失其正한 皇帝堯舜을 指한 것이다.
正이라 함은 乾의 剛健中正의 正으로서 貞하여 保合한다는 뜻이니 上九는 陽極의 位에 있으므로 保合한 然後에 喪亡치 아니하는 것이오 그러므로 動하면 悔가 있다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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